한국전쟁 유엔군 용사 추모 공원 재단 발기대회
2025. 11.11일 오천 11시 서울 한남동 그랜드 하이어트 호텔 그랜드 볼 룸
공원 설립 취지와 배경 설명문: 박선근 공동 준비 위원장
안녕 하십니까? 미국 애틀랜타에 살고 있는 박선근입니다.
부족한 제가 존귀하신 여러분들 앞에서 감히 역사적인 사업을 설명 드리게 돼서 영광입니다.
우리 재단은 세계에서 가장 준엄하고 웅대한 한국 전쟁 추모 공원을 세우려고 탄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공원을 건립하기 위해서 조형물들이 들어설 1,700평을 포함해서 약 5,000평의 부지와 약 600억원의 예산이 필요 합니다.
공원 부지를 정부의 적극적 성원으로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큰 숙제입니다. 건립기금은 100만명 이상의 한국 국민들이 참여하는 거국적 캠페인으로 모금이 될 것입니다.
남녀노소 100만명 이상의 남녀노소 한국인들이 천원으로부터 수 억원의 크고 작은 기부금을 자진 정성으로 이 추모 공원을 헌납을 할 때 산화하신 영령 들깨서도 희생에 다한 보람을 더욱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는, 이곳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8살때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어린 소년으로서 식구들과 함께 피난길에 나섰고 전쟁터에 합류를 하였습니다.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한국인과 다르게 생긴 모습을 한 미국과 유엔 각국에서 파병된 병사들이 멀고 먼 타국의 전쟁 터에서 한국인들의 자유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전사를 당하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노랑머리를 가진 어느 병사는 논두렁에 업 드려 죽어갔고, 피부가 까만 어떤 병사는 콩밭에 바로 누움 체로 하늘을 향해 눈을 뜨고 죽어 갔습니다.
어느 여름날, 나와 9살짜리 개구쟁이 친구 두 명과 함께 피난지의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화스럽던 푸른 하늘에서 갑자기 굉음과 함께 전투기 한 대가 연기를 뿜으면서 우리들이 놀고 있던 인근 야산에 추락하였습니다.
우리들 세명의 어린이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현장으로 달려 갔습니다.
전투기의 잔해는 불꽃처럼 곳곳에 떨어져 있었으며 현장에서 우리들은 살아 남았을 지도 모르는 미군 조종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시야를 막은 것은 부상을 당한 미군의 모습이 아니라 갈갈이 찢어져 나무 가지에 언 처진 조종사의 살점 들이었습니다.
나뭇가지에 그의 시신 일부들이 걸려 있었고, 휘어진 권총 하나는 나뭇가지에 걸쳐진 그의 시신 창자에 매달려서 벽 시계의 추처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저와 소년들은 전쟁 중에 수 많은 시신들을 봤지만 이처럼 처절한 현장은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할 말을 잃고 서로를 보면서 눈물을 머금었습니다.
우리들이 할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고 돌아서서 마을로 가려다, 클로버 꽃으로 가득한 풀밭 위에서 사진 한장을 찾았습니다.
다복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흑백 가족 사진속에서 그 전투기의 조종사로 짐작되는 청년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으로 그의 아들로 짐작되는 사람들도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그후 전쟁은 끝났고 평화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열심히 일 했고 자유를 구가하게 되었습니다.
수십년의 세월이 흘렸습니다.
대한민국은 산업발전을 이루었고 국민들의 생활도 풍요로워졌습니다.
저는 1974년에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미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1990년 걸프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은 모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미국 의회에서는 미국 젊은이들의 징집을 토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16살이었던 막내 아들에게 정부로부터 징집등록을 위한 신체검사 통보서가 날아왔습니다.
저는 깨어났습니다. 귀하게 키운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 이라크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막에 파병이 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무르자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40년을 잊고 있었던 한국전쟁에서 산화하신 미군 병사들의 시신들의 모습이 기억속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많은 조각의 살점으로 전사한 이름 모를 그 한국전쟁때 만났던 조종사의 가족 사진이 나의 가족의 얼굴로 오버랩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한국전에서 산화하신 영령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내 아들의 징집을 위한 신체검사 통보서를 받고 나니,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향한 나의 감사의 양이 너무도 초라한 것을 알았습니다.
이를 깨달은 저는 지체 없이 1991년 내가 사는 조지아 정부청사 광장에 한국전에서 산화하신 740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묘비를 세웠다고 돌아가신분들을 살려 낼 수는 없지만 최소 한도에 추모 행위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어서 테네시 주 한국전 참전용사비 건립에 후원을 하였고,1995년 미국 수도 워싱턴에 한국전 참전용사 공원조성을 후원했습니다.
3년전인 2022년에는 한국정부와 공사비를 부담하는 '추모의 벽'을 세우는데 추모재단의 이사로 활동하며 기부자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자유와 번영에 대한 감사하는 한국인들의 표현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봅니다.
제가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정작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오직 수혜국인 한국에 추모 기념 시설이 빈약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전쟁 기념관에 한국전쟁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웅장함의 규모가 워싱턴 추모공원 규모에 익숙한 유엔 참전용사들의 눈높이에 못 미친다는 것이 저희들의 판단입니다.
36,564 명의 자국민을 희생해 가면서 대한민국을 도운 미국인들은 200여개의 한국전 참전용사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웠고, 미국 각지에는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의 이름을 수많은 고속도로에 부쳐 놓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오직 혜택 국인 대한민국에는 역 20개 정도의 기념물이 세워져 있을 뿐입니다. 부산에 마련된 공동 묘 이외에 한국 어느 곳에도 유엔군 용사들을 따로 모신 추모 공원이 없음은 이 추모 공원을 지으려는 준비 위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최대 추모 시설인 전쟁기념관에 세워진 추모 명판은 유엔군 희생 장병의 이름이 포함되었으나 한국 전쟁 희생자 210,000 여 이름들 중에 일부입니다. 한국의 경재 사정이 좋지 않을 때 ( 1인당 국민소득이 7000불) 세워진 명패는 미국 워싱턴에 새워진 추모의 벽 규모에 비해서 빈약하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부산에 있는 유엔군 묘지는 한국에서 몇 개 안되는 외국 병사 희생용사를 기리는 시설 중에 하나이지만 그 위치가 다른 공동 묘지처럼 외진곳에 있어서 각별한 방문 사연이 없는 분들이 방문하기에 용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여 국인 미국은 수도 중앙 지역인 내셔널 몰에, 그리고 제일 붐비는 링컨 기념관 앞마당에 설치되어 있으므로 많이 비교가 됩니다.
우리 한국의 추모회를 지원하는 미국에 세워진 추모재단에는 전 유엔군 사령관인 Telelli 장군과 Ellis 장군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재단 이사진에는 한국전의 현대화를 촉발시킨 한국전쟁의 영웅이신 Vanfleet 장군의 외증손자 Blake 씨와 장진호 전투의 영웅이신 데이비스 해병대 장군의 아들 Davis 판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미국이 구국 영웅들을 기리는 재향군인의 날입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중요한 일들을 뒤로 미루시고 주중에 이 역사적 사업을 함께 이룩하고자 참석을 하신 여러분의 모습은 우리의 계획이 순조롭게 지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정성을 다해 건립 한 이 추모공원을 헌납 하는 날을 상상을 하고 가슴 벅차게 기대 합니다.
여러분, 경청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한 팀의 일원입니다" 우리들의 의지와 정성으로 이루어지는 이 역사에 저도 한 몫을 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시는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 하신 영령들 위에, 그리고 우리들의 사업 위에 하나님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